한국교회 6.25 전쟁 관련 설교 (04) (2024)

(03)

새 나라 꿈틀거림

겔36:22-28

김기석목사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렵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 끝나지 않은 전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오늘로 꼭 67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분단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이 나라 위에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유럽이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면, 한반도는 전면적인 전쟁의 위기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지속적인 미사일 실험, 전쟁을 가상한 한미연합훈련을 보면서 1956년에 박봉우 시인이 쓴 '휴전선'이 떠올랐습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분단상황을 떠올리며 시인은 진저리를 칩니다.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이 땅에 불고 있는 이 징그러운 바람은 언제 잦아들고, 천둥을 예감케 하는 불안한 느낌은 언제나 스러질까요? 주님 오시기 전 8세기 무렵, 전쟁의 참화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전쟁이 없는 세상의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2:4, 미4:3)

세상 물정 모르는 몽상가들의 어처구니 없는 꿈처럼 들리지만, 이런 꿈조차 없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숨을 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정치가들은 현실적인 사고를 하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역사를 종말의 빛 앞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종말은 시간 저편에 있는 세상의 끝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우리 삶 속에 엄습하는 현실입니다. 종말이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많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현실의 논리에 따라 사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에 지펴 사는 이들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은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통해 열리는 법입니다.

? 연금술

믿음을 연금술에 빗대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연금술(alchemy)이란 철이나 구리, 납 따위의 흔한 금속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변화시키려는 유사과학 기술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연금술의 진짜 목표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사의 존재가 되는 데 있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꿈이지만, 그 꿈이 화학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신앙이 연금술과 유사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긍정적인 경험도 있고 부정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늘 긍정적인 경험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질병, 실패, 상처, 좌절, 이별, 배신, 외로움, 공포, 미움, 시기, 증오, 테러가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가급적이면 그런 경험들을 멀리 하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득이 겪어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가급적 빨리 지나가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압니다. 그런 경험조차 우리 삶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외시하고 싶었던 그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좁장한 자아에 갇힌 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슬픔을 겪어보았기에 지금 슬픔에 처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아픔을 경험했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좌절을 경험해봤기에 지금 넘어진 사람들 곁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 몸서리쳐 보았기에 누군가의 벗이 되어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았고, 증오심에 사로잡혀 보았기에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촉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경험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그것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길 안내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런 일들을 겪어낼 때 우리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던 어두운 그림자는 흰 그림자로 변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평등 공동체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국의 공포를 맛보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깨달음에 당도했습니다. 압박과 설움을 겪던 포로민들이 부른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인양 여기고, 다른 이의 죄를 자기 몸에 짊어진 채 매를 맞는 고난 받는 종에게서 세상을 구원하는 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난과 시련을 타자에 대한 빛나는 사랑으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적 연금술입니다.

? 구원하시는 하나님

바벨론 포로 시기에 활동했던 에스겔은 참담하게 무너진 조국의 현실을 보고 슬퍼했지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한용운의 말처럼,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뿌리는 물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 지은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려 그 땅을 더럽혔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 그 땅을 더럽혔으므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다"(겔36:18)

우상을 섬기는 것과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까닭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어서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욕망을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욕망은 독점을 지향하는데 하나님은 나눔을 명하십니다. 욕망은 지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섬김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에게 돌아설 때가 많습니다. 우상은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으며, 우리 욕망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과도한 욕망을 추구하는 이들은 타자들에 대해 늘 폭력적입니다. 우상숭배와 피 흘림으로 요약되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천대받으며 산 것은 죄에 대한 합당한 징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 백성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려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렵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36:22). 말은 무뚝뚝한 듯하지만 깊은 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어느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악어를 닮았다고 했습니다. 악어는 옹니여서 한번 물은 먹이는 뱉어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번 물면 삼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하나님깨 삼켜져서 흡수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밉다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욕망의 길을 따라 걷다가 더럽힌 주님의 이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흩어진 곳에서 데리고 나와 한데 모으고, 그들을 데리고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상으로 인해 더럽혀진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맑은 물을 뿌려 그들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회복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인용해서 유명해진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아실 겁니다.

"광야에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사40:3-4)

함석헌 선생님은 이 대목에 나오는 광야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민중의 가슴에 있는 빈 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빈 들에 자라는 것은 가시나무 뿐입니다. 그 가시는 어떻게 자라게 된 것일까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정치가 그들 가슴에 가시밭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서로에게 살갑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다가설 수 없으니 더욱 외로워집니다. 하룻밤의 쉼도 녹록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함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툭 나온 바위 같은 것이 있고, 쑥 들어간 구멍 같은 것이 있어 거기 사자, 여우가 엎디고 독사가 깃들이었다."(함석헌 저작집3, <새 나라 꿈틀거림>, 한길사, 2009년 3월 13일, p.130)

이게 참 적나라한 우리 마음 풍경이 아닌지요? 그런 가슴에 길을 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사랑이 있고 의가 있는 사람이라야 길을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 사랑은 그리고 우리 의는 변덕스럽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우리 임금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임금으로 모실 때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이 열립니다(시85:10-11). 하늘 빛이 우리에게 비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있는 맹수와 독사가 물러갑니다. 맹수와 독사가 물러갈 때 지긋지긋한 분단의 영도 물러갈 것입니다.

? 새 나라를 바라보며

백성들 속에 있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닦아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 심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은 무정한 마음입니다.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마음은 본래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민중신학자인 박재순 박사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돌로 만든 떡을 먹었기에 우리 가슴이 돌가슴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힘의 나라'와 '뜻의 나라'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만 손에 쥐면 이룰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힘의 나라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는지 묻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뜻의 나라입니다. 지금 세상은 급격히 힘의 나라로 기울고 있습니다. 힘의 나라 주민들이 만드는 세상은 살풍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 전체가 남녀노소,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까지도 힘만 추구할 뿐 뜻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딜 가나 호연지기는 없고 사사로운 이익에만 밝은 비루한 속물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숲속의 나무가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아름드리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깊은 뜻을 마음에 품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인데, 우리 사회가 수십 년 동안 돈과 권력 말고는 다른 어떤 가치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버려 정신의 크기나 깊이를 보여주는 사람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졌어요. 하나같이 잇속을 계산하면서 잔머리 굴리는 사람들 뿐이잖아요."(김상봉, <네가 나라다>, 길, 2017년 5월 20일, p.130)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는 세계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뜻의 나라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방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리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려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5-27)고 하셨습니다. 뜻이 들어가야 참 사람이 됩니다. 야훼 하나님은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 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시마고 약속하십니다. 그 마음과 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평화와 생명이 넘실대는 세상은 우리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고, 정성을 다해 대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분단의 세력은 물러가고 평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새 나라는 그렇게 태동됩니다. 여전히 우리 역사는 어둡고 척박합니다. 그렇기에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이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마음과 새 뜻을 품고, 새로운 역사를 낳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04)

북녘 땅에도 복음을

사7:1-14

류영모목사

I. 드로르

합동측 평안교회에 이성택 원로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6.25때 북한에 사모님과 자녀들을 두고 남하해 오셔서 50년동안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며 독신으로 수절해 오셨습니다.

금년 광복절에 100여명의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행여 목사님께서도 북한의 가족을 만나 50년 맺힌 한을 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통일! 그것은 1천만 실향민 이산가족들만의 꿈은 아닙니다. 우리 민족 모두의 소원이요 한국 땅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숙제입니다. 그것은 북진통일이나 적화통일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으로 미움을 없애고 무신론을 무너뜨리고 물질주의의 허상을 깨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통일은 단순히 분단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꿈꾸어 봅니다.

통일 한국은 복음화된 사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지배하는 이땅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어 봅니다. 오늘은 이땅에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발한지 꼭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주일이었습니다. 50주년을 성경은 희년이라 부릅니다.

성경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난 그 다음해 7×7=49 즉, 50년째 해를 희년이라 일컬었습니다. 이해를 다른 해와 달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땅에 사는 모든 거주자들에게 “드로르” 즉,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라고 명했습니다.

드로르 - 해방과 자유가 선포되면 종으로 팔려갔던 사람들이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습니다. 빚 때문에 토지나 가옥을 잃었던 사람들이 되돌려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환경이 원대복귀된 동일한 조건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하는 평등과 자유의 날이 희년입니다.

성경은 희년의 정신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땅과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억압하고 분열시키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래서 이 민족이 분단된 채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며 우리는 해방이 되는 줄 알고 마냥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국토가 갈라지고 민족이 엉뚱한 이념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침략국가였던 독일이 제2차 대전이후 책임국가로서 분단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침략국가인 일본이 분단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전쟁의 희생자인 한반도가 왜 분단이 되어야 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언제 분단을 원했습니까? 그 분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참여하고 동의한 적이라도 있었더란 말입니까?

분단이후 침략 전쟁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시작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동안에 유럽전지역에 투하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이 투하되어 삼천리 금수강산은 하루아침에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250만의 군인과 600만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300만의 피난민과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낳았습니다. 이 전쟁으로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진 것 말고는.

그후 50년 우리는 통일을 소원하며 꿈에도 소원을 노래해 왔습니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 이겨레 살리는 통일 이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이 노래는 지금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안병현 선생의 곡입니다. 임수경 양이 북한에 들어간 후 북쪽에서 크게 유행을 했던 노래입니다. 한번은 북쪽에서 안병현 선생을 초청했습니다. 그때 선생은 정중히 거절하며 남북이 화해하면 판문점에서 평화의 합창단을 조직하여 선생이 직접 지휘하며 목매이게 부르고 싶다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II. 한민족 앞의 소망

우리는 얼마나 오랜세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통일을 소원해 왔습니까? 이 소원은 어느 개인의 소원이거나 어느 정당, 어느 계층, 어느 종교의 소원이 아닙니다. 전 민족의 소원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50년 참으로 분단된 국토 안에서 서로 아픈 걸음을 걸어왔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섹스피어를 못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 역사는 알아야 한다. 그래, 수천년을 두고 매맞고 짓밟히고 조롱받고 속임당하는 이 백성을 생각하면 눈물없이 넘어갈 수가 없다.」

신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국이 있습니다. 저는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지 저는 민족과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망과 기도가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교회는 이곳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북녘에 있는 동포들에게까지 전 한민족 앞에 예수그리스도의 소망을 선포하고자 한소망교회라 이름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민족 앞에 소망을 선포합니다. 통일한국, 복음한국은 세계 앞에 당당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소망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한강너머 북한 땅이 보이는 이곳 일산에 자리 잡은 것도 이곳이 통일도시가 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이곳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면, 나는 예수복음으로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리렵니다. 내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었다면 나는 예수복음으로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전 1989년 저희 총회교육부는 여름 성경학교 교육주제를 “통일 교육”으로 잡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통일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때 이종은 「하나님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소년부 여름 성경학교 교재를 집필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빨갱이로 모함을 받았는가 하면 총회교육부 총무의 목이 이 일로 날아갔습니다. 동료 집필자들이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찌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III. 무너진 북한교회 재건의 꿈

이러한 제가 지난 6월 13일 - 15일 대통령 일행이 그 옛날 화려했던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 땅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통일을 염원하며 불철주야로 기도해 왔던 한국교회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체육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합의를 보았으나 그 누구도 종교의 문제를, 신앙자유의 문제를, 무너진 북녘 땅에 교회를 수축하는 이 문제를 거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번 회담의 가장 결정적인 약점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낸 화해의 사신들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요 영부인은 기독교 장로입니다. 임동원 국정원장은 감리교 권사입니다. 한광옥 비서실장, 황원탁 안보수석은 장로교 안수집사입니다.

대통령 곁을 지켰던 강성모 실향민 돕기회장은 장로입니다. 프레스센타에서 브리핑을 맡고 있는 사람은 협상대표를 맡았던 통일부차관 양영식 장로였습니다. 저들이 진정 신앙인이었다면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차후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분명히 신앙의 자유, 무너진 북한교회 재건문제에 합의가 있기를 크게 기대해 봅니다.

그러면서도 식사시간마다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이나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영부인과 수행원들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문 어느 구석에서도 심지어 기독교신문에서 조차 이 광경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명한 것을 제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식사시간마다 눈을 감으니까 한 북한관리가 “왜 밥만 들어오면 눈 감습네까?” 묻더랍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다음부터 밥만 들어오면 “빨리 또 눈 감으시라요” 그러더랍니다. 식사중에 “교회에서는 장로가 높습네까? 목사가 높습네까?”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안한 얼굴과 당당함을 저들이 보았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기독교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여러통로로 알려 왔습니다. 북한의 문을 연 것은 바로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교회의 헌신과 애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빌리그레함은 북한 땅에서 폐결핵 환자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가슴아파하며 오랫동안 세계도처에서 돈을 모아 의약품을 보내왔습니다. 끝도 없이 사랑의 자전거를 보냈습니다. 남한에 많은 교회와 목사님들이 은밀하게 양식을 보냈습니다. 화목제물로 소떼를 몰고가는 기업가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에대해 전쟁물자로 쓰여지면 어떻게하나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평화를 위해서는 든든한 안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김정일 신드롬을 경계합니다.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을 너무 쉽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구걸하듯 양식을 이곳 저곳에서 얻어먹은 군대가 전쟁을 하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적군의 양식을 얻어먹은 군대가 얼마나 당당히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북녘땅에 무너진 교회를 수축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노력도, 어떤 댓가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앞에 우리의 땅끝은 분명 북녘땅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달릴 수가 있고 육지가 끝나면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세계 어디든지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저 별나라도 달나라도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일산에서 북쪽으로 30분을 채 마음껏 달리지 못하여 철의 장막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달리던 기차는 우뚝 서서 “철마는 오늘도 달리고 싶다” 외친 세월 50년이 흘러 갔습니다.

IV. 지옥에서 해방

오늘 본문에 분단의 한 역사가 나옵니다. 때는 예수님이 나시기 약 800년전 일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조가 깨지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유다 나라를 건설했고 북쪽엔 10지파가 모여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나뉘어진 남북왕조는 걸핏하면 싸움을 했고 때로 외국의 힘을 빌어서까지 상대를 치곤 했습니다.

본문 이사야 7장에서 북쪽 이스라엘 왕이 아람 나라를 등에 엎고 남쪽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유다로서는 전혀 예측도 준비도 못한 일이라 아하스 임금과 온백성은 두려워 떨 수 밖에요.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유다를 위로하고 오히려 큰 꿈을 꾸게하는 일련의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낙심하지 말아라. 지금 너희 나라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 저들은 부지깽이처럼 꺾여지게 될 것이다.” 그 결론이 본문 마지막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앞에서 조국의 장래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는 백성들에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적들은 지금 개미떼처럼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막을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응답을 주신다면 강한 무기를 공급해 주마. 아니면 넉넉한 지원군을 보내 주마.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반드시 이긴다. 약속의 징표를 보이리라.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열세한 군대와 조악한 무기로 강한 적군을 이기는 일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처녀가 아기 낳는 일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본문이 말하는 메시지는 처녀가 얘기 낳는 엄청난 일을 통해 전인류를 구원할 내가, 나는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며 전능자임이니라. 불리한 전쟁을 역전시켜 너를 구원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겠느냐? 이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중국과 러시아에 복음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믿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 아침에 선교의 문이 열려졌습니다.

통일도 북한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한국교회는 신뢰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처녀 몸에서 구세주가 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땅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선교에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인 시각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낙관론도 금물입니다.

물론 지금 북한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교회가 봉수교회와 칠곡교회 둘 뿐입니다. 그 외에 지하에 500내지는 1,000여 처소교회가 있어서 5만 내지는 10만여명의 교인들이 은밀히 예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대통령이 평양에 감으로 김정일이 은둔생활에서 해방됐다고 죠크를 했습니다. 그가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려고 할 때에 가장 큰 걸림돌은 종교의 쇠빗장을 푸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터키가 유럽 연합 EU에 가입하고자 할 때에 선교의 자유를 선언하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한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김정일을 서울에도 데려오고 미국, 일본과도 만나게 해 주어 문호를 개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선교의 문, 복음의 문을 여는 일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지금 북한교회 문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쟁기를 들려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교회가 더욱 성장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더 큰 부흥의 불길을 맛보아야 될 책임이 여기에 있는 것이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들을 은둔생활에서 해방시켰다면 이번에 우리교회가 그들을 지옥에서 해방시킬 차례입니다. 뱃길이 뚫렸습니다. 휴전선 육로가 열렸습니다. 하늘로 비행기가 날아 들어갔습니다. 경의선 철도를 놓는다고 합니다. 이제는 천국길만 뚫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케도(KEDO) 직원들 가운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어서 지금 이시간에도 북한땅에서 당당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 그들의 찬송, 그들의 태도, 무언의 향기, 부드러운 삶, 이 모든 것들은 이미 놀라운 선교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예수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말하는 구나. 우리교회 최대일 집사님이 케도(KEDO) 시공단장으로 북한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마음으로 여러분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엄청난 기적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휴전선을 녹이지 못하겠습니까? 철의장막 북한땅의 문을 열지 못하겠습니까? 칼과 총을 녹여 괭이를 만들고 보습을 만들지 못하시겠습니까?

비료를 싣고 쌀을 싣고 들어가던 그 차에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날이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겨레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난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주님은 역사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은 분명 나와 함께 하셨고 여러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분명 성경은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와 함께 하셨던 주님, 북녘 동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우리주님, 북한 형제자매들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가 있고 비젼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사실 통일에 드는 비용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쉽게 생각하면 통일하지 말고 우리끼리 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잘 살 수도 있습니다. 기득권 층에 계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댓가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마땅히 우리가 지불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런점에서 오늘 진정 울어야 할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이 아니라 저들을 구원해야 할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이 다가온 민족의 비운과 거기서 함께 타락해 가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다고 하면 한국교회도 북한 선교에 대한 비젼을 평화에 복음을 좀더 깊이 있게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더라고 한탄하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일찍이 평양 땅을 바라보며 울며 울며 설교하셨습니다. “평양아 평양아 예의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대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구나.”

북녘땅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해야 할 때입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부르짖던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만이 이 민족을 구원하고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의 환상을 가진 민족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복음화의 비젼을 가진 교회를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입니다.

V. 예수정신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 한가운데서 한국민족이 함께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끓는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처녀 몸에서 잉태되시고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땅의 정치 지도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빵을 나눠주는 경제 지도자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바로 죄악으로부터 이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민족의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달러가 말라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이 메마르고 진리가 말라서 망하는 것입니다. 휴전선 철조망 세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을 세우고 정의를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이제 이민족의 죄를 우리가 함께 가슴에 끌어안고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 동포의 모든 허물도 우리가 가슴에 끌어안고 회개해야 합니다. 일찌기 맥아더 원수는 한국을 떠나며 이제 이땅의 문제는 신학의 문제라고 역설했습니다. 국방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요, 진리의 문제요, 정의의 문제란 말입니다.

일본의 한 비평가는 IMF이전에 한국의 경제번영을 꼬집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한국백성은 노동의 신성함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벌면 일하지 않는다. 한국의 지도자들,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애국심이 없다. 그런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으며 북녘땅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저들에게 자유를 나눠주며 해방을 선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미국이 잘 포장하여 가져다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우연한 기회에 굴러 들어오는 요술 호박이 아닙니다. 시간만 가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기계장치도 아닙니다.

예수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늘보좌에서 내려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신 예수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까지, 말구유까지 낮아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흘려 절규하며 돌아가신 그 구원의 정신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통일될 수 있습니다.

VI. 가시고기

같은 희생으로 최근 서점가에서 꾸준히 베스트 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책 가운데 조창인의 「가시고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가시고기의 얘기를 함께 함으로 오늘 6.25 희년 예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가시고기이라는 작은 민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민물고기는 엄마 가시고기가 알들을 낳은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돌봅니다. 알들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알들을 보호하지요. 알들은 깨어납니다. 새끼들이 자라 제갈길로 가고 나면 홀로 남은 아빠 가시고기는 돌틈에 머리를 쳐박고 죽어 버린답니다.

이 소설은 백혈병에 걸린 열살자리 정다움이라는 아들과 가난한 아빠를 떠나버린 아내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아빠의 독백을 통해 부자간에 뗄 수 없는 절절한 사랑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이 아빠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살리겠다고 병든 아들을 2년 세월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보지요. 전 재산을 팝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양심마저 팔아 병원비를 마련해 봅니다.

마지막에는 골수이식을 하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불법인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한쪽 눈마저 팝니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눈을 뽑기 위해 종합검진을 하는 가운데에 자기 몸에서 커다란 암덩어리, 간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 아빠는 교회나가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오직 고통속에 있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합니다. 아들대신 내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몸부림합니다.

아이는 다행히 골수이식이 잘되어 건강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간암말기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엄마에게로 떠나보내고 이 가시고기 아빠는 아들과 40일 동안 지냈던 산골마을로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백혈병든 아이처럼 만신창이 된 북녘땅을 구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다. 새끼를 살릴 수 있다면 내 머리를 돌틈에 처박고 죽어도 좋다는 한마리 가시고기의 사랑을 한국교회는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을 살릴 수 있고 겨레를 살릴 수 있습니다. 범죄한 내 백성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도 좋다며 몸부림했던 모세의 절규만이, 사도 바울의 몸부림만이, 저기 황무한 북한땅을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이 사명이 주어 졌습니다. 함께 준비하십시다. 차분히 기도하며 준비하십시다. 이 교회에서 자란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 안고 북녘땅으로 들어가는 그날을 꿈꾸며 기도하십시다.

주여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애굽 노예의 사슬을 끊으시던 당신의 손으로 이제 남북 분열의 사슬을 끊어 주시옵소서. 그 옛날 에서와 야곱이 미움을 삭이고 얼싸안고 울었던 것처럼 이제 남과 북이 서로 용서하는 사랑에 감격하여 울게 하소서.

맛잃은 소금같은 한국교회를 용서하시고 빛잃은 등대되어 민족을 방황케 했던 교회에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한국교회 때문에 조국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남과 북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게 하시옵소서.

한국교회 6.25 전쟁 관련 설교 (0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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