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화가의 미완의 사랑…꽃보다 환한 예술로 피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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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6-21 06:13 (금)

  • 기자명 이서원
  • 입력 2024.06.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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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감마르조바, 조지아] 7. 사랑의 도시 '시그나기'에서 만난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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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의 미완의 사랑…꽃보다 환한 예술로 피다 (7)

조지아는 산의 나라로 일컬어질 만큼 끝없는 산맥과 봉우리들이 물결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 이곳은 약 800m의 높이에 있으며 알라자니(Alazani) 대 평원이 바다처럼 펼쳐진 넓고 잔잔한 곳으로 사랑의 도시라고 일컫는 시그나기(Signagi)다. 최동단의 카케티 지역에 있으며, 24시간 혼인 신고를 할 수 있도록 관공서도 문을 열어 놓는다니 정말 대단한 배려 아닌가. 도시라고 해봐야 고작 길 하나를 가운데 두고 오밀조밀 집들이 이어진 게 전부지만 꼭 우리나라의 경주와도 같이 고즈넉하고 품이 너른 고도(古都)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바쁘게 동분서주하며 다녔지만, 여기서는 왠지 모든 게 느릿하고 그냥 하루쯤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일찍 짐을 풀고 산책에 나섰다. 네모난 돌이 촘촘히 박힌 옛길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랜 건물이 푸른 나무와 어우러져 그림 속으로 걸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24시간 결혼과 혼인신고가 가능한 곳

시청 광장 조금 못 미쳐 길가에 조각 동상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돈키호테와 로시난테가 연상된다. 작년에 왔을 때는 이걸 보고도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다. 그런데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즐기는 거라고 하듯이 작품의 이야기를 국내에 가서 알게 되었다. 그제야 발을 동동 구르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1년 만에 이곳에 왔다. 순전히 여기로 굳이 온 이유는 당연히 동상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조지아의 국민 영웅인 미술가 니코 피로소마니 (Niko Pirosmani 1862~1918)의 작품 '당나귀를 탄 남자'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는 무명의 화가로 술집 여자의 초상화, 간판, 인테리어용 벽화 등을 그리며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온 프랑스 여배우 '마르카르타'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가난했기에 자신이 그려둔 그림과 집, 심지어 제 몸의 피까지 팔아 백만 송이 장미를 샀다. 그리고 그가 머물고 있던 여관 앞에 밤새 아름답게 장식했지만, 다음 날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훗날,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센스키'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러시아 국민 가수 '알라푸카초바'가 '백만 송이 장미'로 불러 유명해졌다. 이후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 심수봉이 개사하여 많은 사랑을 받으며 히트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더 슬픈 두 사랑의 미완이 시그나기 저 평원을 메아리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명화가의 미완의 사랑…꽃보다 환한 예술로 피다 (8)

백만송이 장미로 전한 마음…떠나버린 여배우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더욱 짙은 이 거리에서 당나귀에 올라탄 남자를 본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어 손을 잡는다.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솟아오른다.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던 피로소마니, 1918년 그가 죽은 후, 1960년대 말이 되어서야 서서히 그림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68년 바르샤바를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그의 그림이 알려지게 되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쿄, 취리히 등에서 개인전이 열린 후 각 나라 박물관에 그의 그림이 소장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아니라고 외면하며 기성 작가들만의 울타리에 모여든 당시 미술계를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에 몰두했던 피로소마니!

무명화가의 미완의 사랑…꽃보다 환한 예술로 피다 (9)

 현재 조지아의 화폐와 박물관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노점상에서도 그의 그림 사진이 엄청나게 있다. 왜 많은 예술가는 사후에서야 빛을 보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시그나기에 오면 두 사람의 사랑만 생각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무덤조차 발견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외면받은 채 생을 다했지만, 그가 몰두했던 그림은 우리 가슴에 꽃보다 더 환하게 남아 이리도 가슴을 흔들고 있다. 마음을 다 보여 줄 수 없어 꽃을 바쳤지만, 진실마저도 소통될 수 없었던 아픔이 가뭇없다. 바람처럼 가 버리는 인생, 붉은 장미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던 마음을 달래주었던 건 진정 어두운 그림뿐이었을까. 이루어진 사랑보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더 애타게 두 사람을 억지로 묶어 두고 싶은 내 마음도 욕심이라면 욕심일 터!

끊임없는 외침에 18세기 건립한 성벽

성벽을 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만리장성 다음으로 세계에서 큰 성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형태는 조그마하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좁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오른다. 저 대 평원 넘어 코카서스산맥이 울을 두르고, 너머에는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인 다게스탄, 체첸이 있다. 저 두 나라는 아직도 러시아로부터 해방 못 하고 자치 공화국으로 남아있어 안타깝다. 일찍부터 이 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저 두 나라 및 러시아는 끊임없이 약탈과 전쟁이 멈추질 않았다. 그만큼 이 비옥한 영토는 모두가 탐내는 먹잇감이었다. 마침내 1762년 에라클리 2세는 4.5㎞에 달하는 이 성을 쌓아 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801년 러시아에 합병되고 말았다. 저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하지만, 아직도 분리 독립에 맞서 마치 화약고 같은 체첸, 다게스탄을 생각하면 이 평화가 나만 누리는 호사 같아 마음이 더 무겁다.

 화평과 사랑은 온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장 숭고한 가치이며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평화를 위한다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아직도 세계 곳곳에 전쟁이 멈추지 않고 있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과정이 충분한 안전과 행복에 반한다면, 그건 타당한 실리를 답보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이는 알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성채를 내려와 가만히 걷는데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다. 자연스레 종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우리네 시골의 작은 교회 같은 마당에 종탑이 높다랗다. 그곳에서 10대 소년이 긴 줄을 당기며 종지기를 하고 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성스러운지 종이 멈출 때까지 뒤에 서 있었다. 곧이어서 많은 이들이 와서 예배를 드린다.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 왜 이 나라가 80% 이상이 기독교인지 알겠다.

 사랑은 이유가 없다. 따지지 않는다. 더욱이 계산과 손익을 그려보지도 않는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을까 돌아보게 된다. 오래된 도시의 길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보면 나도 거슬러 이곳의 한 배경이 되고 싶다.

무명화가의 미완의 사랑…꽃보다 환한 예술로 피다 (10)

'성녀 니노'가 묻힌 자리에 세워진 보드베 수도원

광장에서 차로 10분쯤만 가면 이 나라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드베(Bodbe) 수도원이 있다. 산길을 돌아서 키 큰 삼나무가 아름드리 솟은 쪽으로 좌회전하면 수도원에 닿는다. 새들은 저들만의 노래로 울창한 숲을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다. 교회는 웅장했으며 카메라로는 다 담을 수 없으리만치 컸다.

 이곳은 바로 성녀 세인트 니노(St. Nino)의 무덤이 있다. 그녀의 부모는 니노가 열두 살 때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요르단에 있는 사막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수도 생활을 하며, 어려운 이웃과 병자들을 돌보다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계시를 받아 이 나라로 들어왔다. 324년경 당시에 불치병을 앓고 있던 미리안 3세의 부인 나나 왕비의 병을 기도로 고쳤다. 이를 통해, 이 나라에 기독교가 아르메니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공인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 하나로 이토록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으며, 외세의 수많은 침략과 지배하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겠다.

 니노가 병들어 죽자, 마리안 3세는 그를 당시 수도인 므츠헤타(Mtskheta)에 장사 지내려 했다. 그러나 관을 실은 수레는 수백 명이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말년에 그가 보낸 이곳에 묻고 작은 예배당을 세웠다. 그것이 오늘의 보드베 수도원이다. 저 멀리 드넓은 평원을 넘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보다 더 무서운 외세의 침략과 수탈, 니노는 죽어서도 이 땅 조지아를 구하려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는가. 꽃의 흔들거림이 애잔하다.이서원시조시인

이서원news@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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