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전영중 드림] 수몰지구(水沒地區) 後-1: 𝑨𝒒𝒖𝒂𝒓𝒊𝒖𝒎 (2024)

* 이름 없는 드림주 (-)

* 원본썰 https://posty.pe/pghqpx

[가비지타임/전영중 드림] 수몰지구(水沒地區) 後-1: 𝑨𝒒𝒖𝒂𝒓𝒊𝒖𝒎 (1)

턱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에 온 세상이 휘청거렸다. 충분히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올 눈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속은 버석하게 말라가는데 숱하게 쏟은 눈물에 잠긴 나는 아가미로 호흡하는 법을 잊은 물고기처럼 익사해 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걸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출발선을 넘어 정신없이 달려가는 마음을 붙잡을 순 없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산 타인을 곁에 둔다는 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작은 충격에도 곧잘 흔들리고 금이 가는 삶에 꼭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꿰맞추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단단했던 모서리가 마모되어 둥글어지고 원래 어떤 모양의 조각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은 후였다. 갈 곳 잃은 마음과 부질없어진 시간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까지 손을 뻗쳤다. 너는 영영 사랑받을 수 없다고,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 속삭이는 소리는 누구도 아닌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내 잘못이라며 나를 미워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독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네…너의…뭐라도 되고 싶었어…….”

전영중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고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젖어있었다. 나의 뭐라도 되고 싶었다는 전영중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넌 내 전부였어.”

네가 굳이 내 무엇이 되려 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었어.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이 너를 귀찮게 했고 네 삶을 흔들리게 했고 너를 울게 했다면 나는 너의 아무것도 아닌 타인이 될게.

……나 너 그냥 못 보내.

네가 뭐라고 그래.

내내 숨겨온 진실을 마주한 그날, 꿈을 꿨다. 나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전영중에게 네가 뭐라도 되냐는 듯 말하는 내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불투명한 스크린 위에서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과거의 기억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네가 뭐라고 그래, 라는 문장 뒤에 어설프게 숨은 넌 내 전부였어, 라는 문장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래. 너는 내 전부였고 그래서 나는 늘 네 앞에서 별거 아닌 사람이 되었다. 그 지독한 불균형에도, 나는 그저 행복해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구단 회식에요?”

[네. 이번 촬영이 SNS에서 반응도 좋고 선수들도 주임님 덕분에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꼭 초대하고 싶다고들 해서요.]

“아….”

마음은 참 고마웠다. 전영중과 마주쳐야 한다는 껄끄러움은 차치하고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된 프로젝트였다. 전문 촬영 경험이 많지 않은 운동선수들을 데리고 여러 차례 촬영해야 했던 터라 어느 정도 난항이 있을 거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애를 먹인 건 강한나 쪽이었다. 강한나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전영중의 번호를 따지 못했고 꼭 전영중이 아니어도 됐던 건지 다른 선수의 변호를 받아 갔다고 했다. 강한나에게 연락처를 준 선수는 강한나와 연락한다는 얘기를 제 입으로 열심히 떠벌리고 다닌 덕에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든 구단 사람이 강한나와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고 나흘이 지나서는 훈련에 집중도 못 하고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있어 감독에게 된통 깨졌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어서는 훈련하다 말고 울면서 체육관을 뛰쳐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본 동정남의 순정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을 역시 모든 구단 사람이 함께 목격하는 사건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구단 담당자와는 이런 은밀한 얘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쌓여버린 덕에 초대를 거절하기가 더 어려웠다.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면 알려달라고 말하자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꼭 말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높으신 분들 없이 실무자들과 선수들만 소소하게 모여 즐기는 자리니 약속 시간 직전에 장소를 바꿔도 된다며 넉살을 떠는 담당자 덕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웃고 나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껄끄럽다는 이유로 피하기엔 아쉬운 자리였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심장이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열고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어댔다.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몇 번이고 주문을 건 게 무색해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뛰어대는 심장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일이 생겨 못 가게 됐다고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다 눈 딱 감고 손끝에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주임님~! 여기예요, 여기!”

나를 향해 반갑게 손 흔드는 담당자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 왔다. 식당 제일 안쪽엔 구단 관계자와 선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가장 바깥쪽 남는 자리에 앉으려는 나를 담당자는 기어코 가운데 자리로 끌고 가 앉혔다. 평균신장이 190이 넘는 거인족들의 다리를 헤치고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이렇게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건 신입생 환영회 때 자기소개를 한 이후로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내 앞에 불쑥 내민 잔을 받아 쭉 들이켜자 환호성이 더 커졌다. 가게를 통째로 빌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시끄럽게 굴었다가는 여느 SNS에 부정적인 목격담이 올라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자기 술도 받아 달라며 성화인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옆에 앉아있었던 건지 이리저리 옮기다 보니 옆으로 오게 된 건지 모를 주찬양 선수가 무리하지 말라며 가득 찬 잔을 가져가 빈 잔으로 돌려줬다. 그런 주찬양 선수의 행동이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주찬양 선수 인기 많죠!”라며 주책맞게 물었다가 “아니요. 인기 없어요. 재미없대요, 저.”라는 대답이 돌아와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버렸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더 깊이 생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자리에 전영중이 오지 않았다는 걸 선수들이 대화하는 걸 듣고 알았다. 그래. 아예 오지 않는 쪽을 선택할 인간이었지,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털어 잊어버렸다. 다행히 술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정신없이 오고 가는 술잔 사이에서 내 의식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갔다.

“…….”

“…….”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전영중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고 둥근 인영 앞에 쭈그려 앉았다. 긴 머리카락은 침과 담배꽁초로 낭자한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쏟아져 있었고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운동화는 뭔가를 잔뜩 흘린 건지 얼룩덜룩했다.

(-)가 이렇게까지 취하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을 챙겨 무사히 귀가시키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가 주저앉아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라면 다들 작정하고 술을 먹인 게 분명했다.

턱이 뻐근해졌다. 꽉 다문 잇새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오로지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얼굴. 보고 싶은데.’

(-)에게 대책 없이 술을 건넨 동료들에 대한 짜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든 생각은 전영중을 웃게 했다. 쓰디쓴 조소였다.

괜히 왔나. 일이 있어 회식에 불참한다는 허술한 이유로는 부족할 게 뻔했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내내 울려대는 핸드폰이 거슬려 탈의실 로커에 넣고 그대로 잠가버렸다. 그렇게 한창 무게를 올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동이 계속 울리던데 급한 연락인 것 같아서요.”

어디냐며, 볼일 다 봤으면 얼른 튀어 오라는 별거 아닌 내용일 게 뻔한데 급한 연락일 리가 없다. 알면서도 굳이 전원을 끄지 않고 로커에 넣어뒀다는 건 기만에 가까웠다. 기만의 대상은, 받아서는 안 되는 연락을 기다리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이야기면서도 가정법을 써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기혐오가 피어올랐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후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회식 장소는 이미 어딘지 알고 있었다.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보이는 기본 배경 화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래도록 핸드폰을 쥐고만 있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땀을 훔치고서는 곧장 회식 장소로 향했고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손끝으로 (-)의 신발 앞코를 톡톡 두드렸다. 별 반응은 없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골목은 방심하기 좋은 장소였다. 금방이라도 더러운 바닥을 쓸 듯한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온도라는 게 없었던 신발과는 달리 (-)의 뺨은 따뜻한 기운을 한껏 머금은 채였다. 술이 들어가 평소보다 더 높아진 체온은 데이기 딱 좋은 온도였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갈증이 이는데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몸을 섞은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와 숨이 턱턱 막히기까지 했다. 몰랐으면 나았으려나.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날 (-)가 술에 취해 한 고백을 끝까지 못 들은 척했다면…….

“술주정 부린 거 아니야.”

“…….”

(-)는 그날 취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어 술이 들어가 평소보다 들뜬 (-)가 우정을 조금 더 그럴듯한 감정으로 포장한 거라 치부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두 번째로 찾아온 후회의 순간은 무척이나 지난했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데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찬양처럼 (-)에게 흑심을 잔뜩 품은 사내놈 말고 (-)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사이를 의심받긴 하겠지만, 집 주소만 알려주면 집에 도착할 즘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를 정도의 정신은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술에 얼큰하게 취한 동료들 사이에 앉아 적당히 맞장구를 치다 돌아가면 되는 거였다.

“…….”

허공을 휘젓던 손이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한 손으로도 잡힐 만큼 작은 머리가 천천히 위를 향했다. 흐리멍덩하게 풀린 동공이 힘없이 부유하다 다시 감겼다. 소매를 붙잡고 있던 손도 툭 떨어졌다. 앞뒤로 흔들거리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망설이는 사이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덩달아 품에 끌어안고 있던 가방에서 소지품이 쏟아져 사방으로 굴러갔다.

제 물건이 쏟아진 줄은 알아도 어디로 굴러갔는지까지는 확인할 정신이 못 되는지 엄한 바닥만 더듬었다. 한 줌밖에 되지 않은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처음엔 눈을 끔뻑거리며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하는 것 같더니 금세 어깨가 축 늘어졌다.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들을 털어내고 잠시만 서 있으라고 말했다. 작게 끄덕이는 머리가 귀여워 아프게 웃었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됐다.

바닥에 떨어진 소지품을 주워 (-)의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었다. 세월아 네월아, 쫓겨난 물건들에 맞는 자리를 되찾아 주며 (-)와 같은 공간에 있는 지금을 길게 늘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잖아. 그새 입버릇처럼 붙어버린 안 된다는 말이 썼다.

“잠깐 있어. 가서 다른 사람 불러…”

옷자락을 붙드는 손에 멈칫했다. 중심도 제대로 못 잡고 흔들거리면서도 옷자락은 야무지게 움켜쥔 손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 (-)를 데려다 줄 누군가를 찾는 대신 택시를 불러 (-)를 태웠다. 택시에 타서도 제 옷을 놓지 않는 손을 보며 못 이긴 척 택시에 올라타 (-)의 집 주소를 불렀다. 택시 룸미러로 식당에서 나오는 주찬양이 보였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그런 주찬양의 뒤를 따라 몇몇 선수들이 식당을 나왔다. 손에 담뱃갑을 쥔 걸 보니 담배를 피울 때가 됐나 보다. 본인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형들의 손길에 끌려 골목 어귀로 들어가는 주찬양이었다. 착한 애였다. 모난 데 없이 사람들과 무던하게 잘 어울렸고 조용하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해 쉽게 휘둘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에겐 주찬양 같은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출발하는 택시를 멈춰 세우진 않았다.

“아, 거 내릴 거요, 말 거요?”

“…….”

택시 기사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덩달아 짜증이 치밀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 때문이 아니었다. 건장한 남자가 인사불성이 된 여자를 데리고 택시에 탔는데 걱정하기는커녕 장사를 방해하는 귀찮은 짐짝 취급한다는 게 짜증이 났다.

결국 전영중이 선택한 건 자신의 집이었다. (-)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이름 정도만 알았지, 집 비밀번호는커녕 몇 호인지도 몰랐다. 호텔에서 재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신의 집 주소를 말하자 혀를 쯧 차는 택시 기사를 보고 있자니 (-)를 호텔에 홀로 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택시는 다시 자신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다시 눈을 감고 싶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기절하고 싶다, 에 가까웠다. 눈을 감는다고 깨질 듯한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곳이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눈알을 굴릴 때마다 함께 울렁거리는 속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얼핏 본 천장과 침구에서 나는 익숙한 향으로 바로 알았다. 이곳은 전영중의 침실이었다.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가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눈을 뜨는 것도 힘든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 주인이 언제 방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노릇인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퍼져 있어야 한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수치심이고 뭐고 지금은 숙취로 회생 불능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더 뻗어 있었을까.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겨우 상체를 일으키는 데까진 성공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는 기시감의 원인을 찾아 기억을 더듬었다. 어째서 내가 회식 자리에 오지 않은 전영중의 집에 있는 건지도 생각나면 좋을 텐데.

‘차라리 안 나는 게 낫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평소보다 더 들뜨긴 했다. 처음엔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을 적당히 거절했지만, 한두 잔 받아 마시다 보니 나중엔 오히려 내가 권하고 다녔다. 내가 취하는 걸 막아주려던 주찬양 선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더 그랬던 것 같다. 주찬양 선수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거 정도야 진작에 알고 있었고 당사자인 주찬양 선수도 구태여 숨기려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지.

“주임님한데 관심 있는 거 맞아요. 그렇다고 제 감정까지 주임님이 책임져 주실 필요 없어요. 영중이 형이랑 불편한 사이이신 거 맞죠? 마음의 짐 하나 더 얹어드릴 생각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명절에 혼자만 떡국을 몇 그릇씩이나 먹은 건지 고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더 연상 같은 발언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좋게 봐줘서 고맙다고 대답했고 주찬양 선수는 그런 내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 그런 거라는 말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에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가 말았다. 좋지도 않은 기억을 주찬양 선수에게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주찬양 선수가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만큼 뻔뻔하진 못했다. 주찬양 선수가 화장실을 간 사이 옆에 앉아있던 몇 명에게만 간단히 인사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레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찬양 선수가 있을 때 간다고 하면 데려다 주겠다고 할 것 같았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바닥이 나를 향해 돌진했다. 다행히 빈 테이블을 짚어 넘어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고 내가 없어도 저들끼리 신이 난 이들은 내가 넘어질 뻔한 걸 보지 못했다.

식당에서 나와 식당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대중교통을 탈 자신은 없었고 택시를 부를 생각이었다. 택시를 부르고 불편하게 쭈그려 앉았다. 고작 택시를 불렀을 뿐인데 온몸이 힘이 쭉 빠진 탓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택시를 제대로 부른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택시를 부르고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던 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쓸 만큼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문고리에 걸린 겉옷과 가방,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과 숙취해소제는 가뜩이나 없는 현실감을 더 없게 만들었다. 설마 술에 취해 전영중한테 연락해 데리러 오라고 한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전영중의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눌러앉아 있는 주제에 이제 와 그걸 걱정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긴 했지만, 눈과 손은 열심히 핸드폰을 찾아 헤맸다.

핸드폰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과 숙취해소제와 함께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으니까. 정갈하게 갠 옷 위에 놓인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핸드폰 아래에 쪽지 같은 게 있었는데 핸드폰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 쪽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배터리가 100%인걸 보니 전영중이 충전까지 해 준 듯했다. 다행히 전영중에게 연락한 기록은 없었다. 잘 들어갔냐고 묻는 이들의 카톡에 하나씩 답장해 주고는 침대 밑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그대로 다리에 힘을 줘 일어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한 행동은 흐느적거리며 침대 위로 엎어진 거였다.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안간힘을 써서 삼키고서는 협탁 위에 있던 숙취해소제를 비우고 목구멍 끝에서 꿀렁거리는 액체를 물로 내리눌렀다. 뭔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속에 많은 양의 액체가 들어가자 그에 대한 반항인지 뭔지 토기가 올라왔다.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금 마신 숙취해소제와 물이 어젯밤 먹은 음식까지 모두 데리고 나왔다. 아.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거지? 방금 만났을 텐데 함께 뒹굴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다니 어마무시한 친화력이었다.

변기를 붙들고 늘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밖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집주인이자 방주인이자 이 변기의 주인인 전영중은 현재 이 집에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옆에 있던 세면대를 붙잡고 일어나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시커먼 눈 밑은 눈물에 젖어 번들거렸고 입술은 하얗게 질려서는 금방이라도 조상님을 뵈러 갈 것만 같았다.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푼 거라 크게 놀랄 일은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었다. 형편없는 조준 실력에 옷이 다 젖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찬물 샤워를 하고 기절한 신경들을 억지로 깨우고 싶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변사체로 발견될 수도 있어 포기했다.

화장실을 나와 아까 확인하지 못한 쪽지를 눈으로 훑었다.

<안 돌려줘도 돼.>

옷을 말하는 거겠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셔츠를 벗고 전영중이 꺼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금 보니 셔츠엔 뭔지 모를 얼룩이 잔뜩 져 있었다.

전영중의 맨투맨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널찍한 소파 한 켠에 잘 갠 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술주정뱅이 전 여친은 침대에서 재우고 본인은 소파에서 잤나 보다. 화장실 칫솔걸이에 걸려있던 칫솔은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두 개의 칫솔 중 하나를 써버렸는데 사과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비틀비틀 걸어가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벽에 붙은 시계의 초침이 똑딱거리며 부지런히 달리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간 세상이 바삐 달리는 소리를 듣다 반듯하게 개어 있는 이불을 주섬주섬 펼쳤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눕자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있던 베개에서 난 향과 같은 향이 피어올랐다. 아마 섬유유연제 냄새일 거였다. 펼쳤던 이불까지 덮고 나니 완벽한 취침 준비였다. 폭삭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서는 눈을 감았다. 지독한 숙취였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본 전영중은 적잖이 당황했다. 당연히 사라졌어야 할 신발이 자신이 어제 정리해 둔 그대로 놓여 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블라인드를 걷지 않아 어둑한 집으로 발을 들였다. 제 집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제 모습이 이상할 법도 한데 그런 사실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머지않아 거실에서 수상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깨끗하게 개 놓은 이불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이불 아래엔 뭐가 있는 건지 불룩 솟아 있었는데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 밑에 있는 게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똑딱똑딱.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시침과 달리 전영중의 발걸음은 소파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졌다. 이윽고 소파 앞에 다다랐을 땐 무너지듯 그 앞에 주저앉았다. 둥글게 부푼 이불이 가라앉았다 부풀기를 반복했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그래서 더 불가항력이었다.

이불자락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불을 걷자 곤히 잠든 (-)가 보였다. (-)가 입고 있는 건 자신의 옷이었다.

밤새 들여다본 얼굴인데도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것처럼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게 이럴 때 하는 말이란 걸 절감했다.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눈앞에 자고 있는 (-)가 아닌 깨어있던 (-)가 자신에게 한 말이 귓가에서 재생됐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련일 뿐이라고 말하던 (-)에게 자신은 미련이 맞다 대답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좋아해…….”

악의 없이 내뱉은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게 된 양치기 소년처럼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라는 부정에서 시작된 거짓말이 제 속을 까맣게 태웠다.

제 마음을 인정하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인정하고 누리기도 모자란 시간 동안 자신은 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외면하고 살았던 걸까. 뜬눈으로 지새운 밤에도 내리지 못한 결론이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의 이불을 덮고, 자신의 집에서 잠든 (-)를 보는 순간 너무나도 간단히 내려졌다.

“……사랑해, (-)아…….”

들어주는 이가 없는 비겁한 고백은 곧 전영중이 쏟아내는 눈물에 잠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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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Mrs. Angelic Lar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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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information

Name: Mrs. Angelic Larkin

Birthday: 1992-06-28

Address: Apt. 413 8275 Mueller Overpass, South Magnolia, IA 99527-6023

Phone: +6824704719725

Job: District Real-Estate Facilitator

Hobby: Letterboxing, Vacation, Poi, Homebrewing, Mountain biking, Slacklining, Cabaret

Introduction: My name is Mrs. Angelic Larkin, I am a cute, charming, funny, determined, inexpensive, joyous, cheerful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