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야기 12", 이이화 - "남한산성" 배경 요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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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야기 12", 이이화 - "남한산성" 배경 요약

prologus 2018. 1. 1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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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에 관해 공부하고자
"한국사이야기" 12권을 발췌 요약했습니다.
가급적 저자 이이화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서 요약했습니다.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의 누르하치(1559~1626)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군대를 만주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키워 나가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의 관심이 조선에 쏠리자 그는 주변 여진족을 아우르며 통합 왕조의 기틀을 닦아 주변국의 위협적인 존재로 대두하고 있었다. 급기야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9, 누르하치는 조선에 2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대범한 제의를 했는데 조선은 이에 대해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며 거절하며 무시했다.

광해군은 명에 가는 사신에게 여진의 정세를 알아보게 했다.또한 의주에 주둔한 장수를 여진 지역에 잠입시켜 동정을 살피기도 하며 혼란스러운 주변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데 힘썼다.조선이 당쟁 등 내부 분열과 왜란이란 전쟁을 겪은 터라 불손한 여진에 대한 토벌 전쟁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정보 수집만이라도 노력하려 애썼다.

이즈음, 조선과 명이 합동해 건주여진을 협공하려 한다는 정보가 누르하치에게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조선과는 원한을 산 일이 없다고 강조하며 애써 담담해했다. 그는 실익 없이 조선과 대립하지 않으려 했다.

1615년 여진의 거의 모든 부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군대와 행정을 팔기제로 편성했다. 팔기는 군단인 동시에 각 개인의 소속집단이었다. 여진의 기본 생업은 수렵이었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를 전투 단위로 편제하여 300명을 1니르로, 5니르를 1자란으로 5자란을 1기로 조직한 것이었다. 1기는 7,500명이 되는 거대한 조직인 셈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여덟 개의 어느 하나에 속했다.

출처: http://jyrkim.tistory.com/74

1616, 누르하치는 정식으로 대금국(후금)을 선포하며 홍경을 수도로 삼고 칸에 올랐다. 이에 명은 물론 조선도 분개했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명에 대해 자소字小의 은혜와 재조再造의 은혜 의식에 빠져 있었다. 이 은혜는 사대에서 더 진전된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다. 명 하늘 아래 다른 제국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은 이제 조선의 적이 된 것이다.

금의 대두로 다급해진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간 왜란에 시달린 조선 원병은 싸우는 체하다 후금에 투항을 통고했다. 명의 은혜를 무시할 수 없어 출병했지만 후금의 존재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불가피하게 취한 조처였다. 후금군의 장수는 투항한 조선의 사자와 그 통역을 융숭하게 대우했다. 그들은 조선을 회유하는 외교책으로 대립을 피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다.

619(광해군 11), 만력 황제가 죽음으로써 임진왜란의 주역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2년간, 후금은 요양과 철령을 점령해 만주 통일을 이루었다.

조선

평산부사 이귀는 호랑이 토벌이라는 명분을 삼아 합법적으로 군사를 모아 역모를 모의했다. 한양에 사는 심기원, 이시백, 최명길, 김자점과 내통했으며, 신경진, 이정구, 김상헌, 장유를 끌어들였다. 한양에도 역모에 대한 풍문은 많았지만 조정은 이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1623313일 밤,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키로 한 거사가 시작되었다.

역모자들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저버리며 후금이라는 오랑캐와 타협한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처사라고 했다. 이것이 역모를 성공으로 이끈 세력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 철저한 주자학파의 문도와 춘추대의로 무장되어 명의 자소-재조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함을 천명한 것이다. 이들에게 실리 외교와 중립 외교로 국익을 도모한다는 따위의 현실 인식은 없었다.

반란은 성공했고 그들은 실과를 따먹기 시작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닌 정태화는 반정 세력에게 이런 세태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반정 훈신 가운데 명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뒤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수하게 종묘사직을 위해 거사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최명길, 장유, 이해가 그러한 사람이다. 이해는 공신에 들었으나 토지와 직책과 종을 받지 않았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전열을 정비한 서인 정권은 후금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교역도 전면 금지했다.

정묘년

68세의 나이로 죽은 누르하치는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 칸의 자리는 명의 아들 중 여덟째인 야심가 홍타이지(태종)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끝에 차지했다. 태종(1592~1643)은 조선에 대해 처음부터 강경노선을 추구했다. 그의 아버지처럼 외교로 회유하려 시절은 끝난 것이었다.

마침내 기병, 보병 35,000이 조선으로 출정했다. 이왕자가 총사령관, 선봉장은 유해였다. 후금은 국서를 통해 출병 동기를 밝혔다. 첫째, 두 나라는 본디 원수진 일이 없는데 조선은 아무 까닭도 없이 명의 군사를 도와 우리나라를 공격했다. 둘째, 금이 요동을 차지했으나, 조선은 이웃 나라로서 일찍이 한마디 좋은 말도 없고 그 후 나라 사이에 좋은 관계를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셋째, 조선은 만주 땅과 우리 땅을 넘나드는 도둑을 방관했다. 넷째, 황제가 죽었을 때 (심지어) 명도 조문하고 새 황제를 축하해 주었으나 조선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1627113일 새벽, 선발대가 압록강을 넘고 있는 동안 의주의 군사는 잠들어 있었다.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

후금은 거의 장애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한양으로 전진하며 동시에 조선 조정에 화의를 제의했다. 조선은 이에 어찔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워 했다. 급기야 후금이 평양에 무혈 입성하자 인조는 그제야 127일 강화도로 파천길에 올랐다. 강화부 관아에서 영의정 윤방을 비롯해 이귀, 이정귀, 최명길, 장유 등 중신들이 모여 대책을 의논했다. 후금의 강화 조건은 명과 관계를 끊고 자기 나라를 형의 나라로 대우하라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명과의 단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후금을 형의 나라로 섬기는 문제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런 내용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성균관 유생들이 거칠게 항의하며 나섰다. 명과의 은혜를 내세워 화의를 배격하며 마지막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 화친 협상이 진행되었다. 후금에 대응하는 문제에서는 당파나 노소에 관계없이 명분파나 실리파로 나뉘어 분란을 일으키다가 끝내는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라섰다.

162733일 밤, 인조는 검은 옷을 입고 대청으로 나갔다. 화친을 맹세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후금이 침입한 지 한 달 20일 만에 정식 화의가 성립했다.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다.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진 의식은 아니었으나, 항복식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벼슬아치는 치욕을 당했다 분해하며 정묘호란은 일단락되었다.

경복궁 / 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


남한산성

태종은 대금국이란 이름을 대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으로 내걸었다. 그는 만주는 여진이 아니라 선언했다. 단일 민족인 여진만 표방하는 이념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그의 야망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16364월에 치러진 청태종의 즉위식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청국에 사신으로 간 나덕헌, 이곽이 황제에게 몸을 굽혀 절하는 국궁배례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둘은 문초를 받고 후금의 국서를 받아든 채 귀국길에 올라야했다.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이들이 황제 즉위식에도 참석하고 국서를 받아들였다며 비난했다. 즉위식 참석을 강요받았을 때 칼을 품고 죽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죄가 크다는 것이었다. 김상헌 등은 강경하게 일전불사를 주장했다. 그는 반정 후 속속 자기 패거리를 정치 일선에 입궐시키며 타협적 의견을 내는 이를 배척해 나가면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반대파인 최명길은 압력에 못 이겨 사직해야 했다.

인조는 후금의 위협이 정묘년 이후 또다시 고조되자 수도의 방어선을 남한산성과 강화도에 두기로 하고 1624(인조 2)부터 이곳에 대해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벌였다. 남한산성은 원래 한성백제 초에 쌓은 토성인데, 고려 시기부터 소홀하게 취급했다. 성은 동쪽 한봉에서 서쪽 청량산을 거쳐 남쪽까지 8천 미터 길이었다.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을 두어 군사를 배치했는데 평상시 주력군은 승려들이었다. 승병 조직은 지휘관, 훈련관을 포함 500여 명으로 편제했다. 승병은 낮에는 군복을 입고 훈련했으며 아침, 저녁으로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예불을 드렸다. 1630년대 중반에 들어 청의 위협이 가중되자 수어청 군사는 속오군에 편성되어 둔전을 일구며 전쟁에 대비했다. 전쟁을 앞둔 시기에는 수어청군 소속으로 12,700여 명이 복무했다. 조선 상비군의 1/8이었다.

1636122, 청군은 마침내 심양에서 출발했다. 주력 부대는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은지 6일 만에 안주,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치달았다. 그들은 전혀 약탈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양식과 장비가 넉넉하기도 했지만 쓸데없이 중간에 시간을 끌지 않으려는 의도와 조선인에게 인심을 잃지 않으려는 전술 차원이었다.

청군의 침입이 거세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기를 결정했다. 남문을 막 나왔을 때 청군이 이미 한양 가까이 이르러 행주산성과 양화진으로 진출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대사간 윤황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보관돼 있는 무기와 식량을 서부 지방에 보내고 임금이 직접 나가 평양을 지킨다면 온 나라 군사와 충신열사들이 적을 무찌르려고 일어날 것이라 주장했다. 벼슬아치들은 임금의 눈치를 살펴 남한산으로 파천을 요구했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0637

인조는 산성으로 방향을 돌렸고 소현세자가 따랐다. 최명길만이 강화를 위해 적진으로 달려갔다. 인조 일행은 뚝섬나루, 방이동을 거쳐 밤늦게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이즈음 청태종은 조선 사신에게 큰소리쳤다. “조선이 산성을 많이 쌓고 있으나 나는 큰길로 당당히 나가 한양으로 들어갈 것이다.” 한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한 임금은 일선에서 지위했으니 힘의 균형은 따질 것이 없었다.

산성에는 벼슬아치와 그 가족, 노비 1,3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군사는 13,000, 군량미는 쌀-19천 석, 겉보리 6천 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산성으로 돌아온 최명길이 강화 조건을 알렸다.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라.” 청군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무렵 이미 한양에 무혈 입성한 상태였다. 진군하며 압록강을 넘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태종이 이끄는 본진 4만여 명은 느리고 여유롭고 호기롭게 뒤따르고 있었다.

인조 일행이 성으로 들어온 지 3일째, 성 밖이 완전 포위 상태라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구원병을 보내라 지시할 수도 없었다. 남한산성은 12월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0637

아래의 책을 중심으로 발췌 요약하였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한국사 이야기" 12권을 참고하세요.

한국사 이야기 12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2번째권. 책앞부분에 컬러그림을 삽입하고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 중 쓰였던 물건,유적지를 전시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아픈 상처와 변화된 삶을 수록하고 인조반정과 후금의 침입, 조청전쟁과 치욕의 항복식을 수록했다. book.naver.com

이이화, "한국사이야기12"를 부분 발췌해 요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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